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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교육센터 설립

조현정이야기

나이 40에 책임질 얼굴 : 네트워크 활동에서 평가된다.

비트교육센터 설립

  • 89년에 들어서 기업의 자금에도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해에 1억원 정도는 사회에 환원을 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전년도인 88서울올림픽때 성화봉송프로그램 개발비 4000여 만원을 사회에 환원하듯 자원봉사했던 것에 대한 고무된 생각도 있었다.
    80년대 말까지 프로그래머들의 90% 이상이 COBOL이라는 랭귀지를 사용하여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었다. 본인의 판단은 COBOL로는 기업의 경영관리업무 이외에는 이용될 수 없기 때문에 절대로 국가의 소프트웨어 경쟁력을 키울 수 없다고 판단해왔다. 시스템프로그램 개발이 가능한 'C' 랭귀지가 대중화되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아쉽게도 당시에는 'C‘랭귀지로 프로그래밍을 하는 전문가는 삼성전자, 삼보컴퓨터 프린터사업부, 서울대 박사과정, KAIST박사과정, QNIX 등등 모두 30명에 불과 하였으며, 대학에서 정규과목에 있었으나 현업에서 이용될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89년 1월의 월스트리트지의 기사를 계기로 고교때부터 목표했던 ‘30세 얼굴 책임’을 달성되었다고 판단한 것은 개인이 똑똑하고 노력하면 판사, 의사, 교수와 같은 평생을 보장받는 전문가로서의 입신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때문이다. 그러나, “40세에 책임질 얼굴은 조직"이라고 판단하고 새로운 10년을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 사회환원, 소프트웨어 강국만들기, 40세를 위한 조직, 이 세 가지를 목표하여 비트교육센터를 89년부터 기획을 하여 90년 8월에 설립하였다. 2000년 8월에는 COEX의 ASEM 홀에서 1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정보통신부 안병엽장관, 중소기업청 한준호청장, SW협회 김광호회장, 벤처협회 장흥순회장 등이 참석을 했다. 이때 평가된 내용으로 설명하면, 사회 환원을 위하여 단순한 기부가 아닌 국가에 엘리트를 키워주는 것이 큰 환원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10년 동안 7년을 적자를 보면서까지 상위 1%의 전문가만을 양성해왔다. 절대평가로 선발하다보니 항상 정원미달상태였으며, 이미 상당한 능력의 전공자들을 선발하여 전문가로 키워내고, 아침 8시부터 저녁 10시까지 6개월 반 동안 교육을 하여 IT업계에서 가장 신뢰하는 비트출신을 만든 것이다. 이들은 평생 취업기준으로 지금까지 100% 취업을 하고 있다. 또한 기술환원을 위하여 ‘비트프로젝트’ 시리즈를 94년부터 매월 1권씩 프로그램 소스코드까지 첨부하여 큰 서점에 공개를 하고 있다.
  • 비록 한 개인과 기업이지만 하기에 따라서는 소프트웨어 강국 만들기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으며, 적어도 “자기가 속한 산업에 기여 없이 돈만 번다면 장돌뱅이일 수밖에 없다“는 신념으로 설립을 했지만, 초기의 수료생들은 'C‘로 프로그래밍을 하는 회사가 없는 관계로 C전문가가 COBOL회사에 취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수요와 공급을 고려하고,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COBOL교육으로 바꾸었어야 했으나, 고집스런 신념으로 임하여 수지는 맞지 않았지만 ’C'교육만을 했다. 2002년 현재 한국에는 COBOL프로그래머가 100명 미만이지만, 일본은 전체 프로그래머의 40%가 COBOL을 사용하고 있다.
    분명 비트교육센터는 한국의 IT강국이 되기까지 큰 기여를 한 샘이다. 당시 KAIST 박사과정 손덕진, 서울대 박사과정 황기태(現,한성대교수), 백선욱(現,상명대교수)씨 등이 아주 열정적으로 동참해 주었다.
  • 10주년 기념식 당일 3920명의 총 비트출신 중에서 이날 참석자가 1400명이었다. 본인이 다녔던 대학 동문 10만명의 총 동창회에는 보통 800명 정도(일부는 부부동반)가 모이는 것에 비하여 상당한 결속력을 가진 조직이 되었다. 수료식행사는 ‘수료식’이 아닌 ‘비트출신 입단식’으로 바꿔서 행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