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 받는 대학생
조현정이야기
대학다닐 때
월급 받는 대학생
- 78년 1학기를 마친 후에 군에 갔다가 귀가 나빠서 귀가조치를 받고 나니 갑자기 할 일이 없어졌다. 2학기 복학을 위한 등록금은 준비되지 않았으며 또한 언제 입대명령을 받게 될지도 불명확했다.
1학년 교양과목 중에서 공업화학과목을 가르치고, 교무부처장님으로 계신 원영무교수 (나중에 인하대학교의 총장이 되심)를 찾아가게 되었다. 학교의 보직교수님이면 어느 정도의 재량권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요즈음은 그렇지 않지만 7,80년대까지만 해도 길거리의 상징탑이나 큰 건물에 붙어있는 시계들은 대부분 시간이 맞지를 않았다. 전기 모터를 이용하는 아날로그방식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한국전력에서 제공되는 전기는 전압과 주파수 변동이 심하여 시간이 맞지를 않았다. 학교에 있는 시계탑도 역시 매번 틀린 상태였다. “가만히 있으면 하루에 두 번이라도 정확하지” 하는 정도였다. 교수님께 이 시계를 고쳐 보겠다고 제안을 하며, 그동안의 성장과정을 설명드릴 기회가 되었다. 당연히 시계의 수리를 허락받았다. 그리고 시계의 외형은 기존의 아날로그로 두되, 회로는 디지털로 설계해 정확한 시계로 바꾸어놓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응용물리학과에 있는 방사능측정기를 고쳐보라고 했다.
교육차관으로 들여다 놓기는 했으나 몇 해째 고장이라는 것이다. 처음 다뤄 본 기종이긴 했지만 마침 회로도가 있기에 원리분석하고서 진단을 한 후에 콘덴서부품 하나를 교환하여 고쳐 냈다.
그 사실은 바로 학교내에 소문이 났으며, 당시 공과대학장이셨던 민수홍교수의 동서인 서울대학교 권이혁총장님댁의 칼라TV를 고쳐내기도 했다. 결국 원영무교수님은 교무부처장실을 나눠서 학교의 교육기자재를 수리를 해주면 등록금 전액과 월급을 주겠다는 제안을 하셨다. 한 학기가 지난 후에는 대규모 강의실마다의 고가앰프를 직접조립해서 설치하는 등의 활동도 계속 늘어 갔다. 이런 생활은 1학년 2학기 복학하기 전 1년 전부터 3학년말 군에 입대할 때까지 3년 반 동안 계속 됐고, 군에 입대 할 때는 지금 인재대학교 의용공학과에 교수로 있는 조종만박사에게 인수인계를 했다. 한 학기 등록금이 40-50만원 할 때 년 간 소득은 500 여 만원 선이었다. 전액장학금, 학교월급, 연구수행비, 교수님들의 가전제품 수리비 등등이 주 수입원이었다.
교직원이 타는 통근버스를 동대문구 석관동에서 아주 편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여러 통근 노선 중에서 이 버스는 석관동인 출발점이다 보니 첫 탑승자로서 뒷좌석에 않으면 잠이 들어버려 구로동쯤에서 타시는 교수님은 서서 가셨다. 3년 이상을 타고 다녀도 아무도 야단을 하지 않으셨지만, 이 점은 지금도 매우 죄송하게 기억되는 부분이다.
“그 놈의 잠을 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 80년 신군부에 의하여 휴교령이 내려졌을 때, 석, 박사 과정의 대학원생들조차 출입이 통제될 때에도 학교의 연구직원의 신분증으로 출입이 자유로웠다. 짐도 챙기지 못한 체 기숙사에서 쫏겨난 친구들의 짐을 찾아 주는 일들이 있었다. 지금은 북한의 실정을 훤히 알고 있지만 북한 사람은 피부조차 붉다고 알고 있을 때, 학교를 점거한 31사단에서 교직원들에게 비디오와 영화를 보여 주었다. 못 먹고사는 북한이 아니라 서울보다 발전되어 보이는 평양시가지와 각종 시설을 봤을 때 상당한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 뒤로 북한이 발전하지 못했을 뿐인 것이지 당시로써는 우리보다는 앞서 있었던 현실을 봤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자료를 볼 수 있을 만큼 학생신분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