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년 조선일보 기사
조현정이야기
비트컴퓨터 창업
85년 조선일보 기사
- 85년만 하더라도 중앙일간지들의 신문면수가 3장으로 된 12면에 불과했다. 맨 뒤페이지는 TV방송프로안내와 스포츠기사로 채워져 있었으며, 글자 폰트는 지금보다 비교되지 않을 만큼 깨알같이 작은 사이즈였다. 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다양한 컴퓨터 폰트에 의한 선명한 레이져프린트 출력에 의한 인쇄가 아닌 금속활자를 하나하나씩 조합해서 인쇄를 해 만드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읽을 면수가 12페이지에 불과했기에 열독률이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높았으므로, 아주 작은 기사조차 널리 알려질 수가 있었다. 이 때에 조선일보의 사회면에 1/3에 걸쳐 나를 소개한 기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인상을 심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1985년 졸업식을 앞둔 2월초에 조선일보 사회부의 김민배기자와 사진기자가 사전의 연락도 없이 안양의 중앙병원(현, 메트로병원)에서 프로그램 개발을 하고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 조선일보는 해마다는 아니지만, 그 해 전국의 대학졸업생들 중에서 화재의 인물을 간혹 취재를 하기도 하는데, 데스크에서 인물추천을 받아 왔다고 한다. IBM-PC가 81년에 처음 발표된 후에 컴퓨터가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니, 해외에서 음악 콩크루대회에서 큰상을 받은 사람보다는 84년 12월호의 월간지 코리아리크루트에서 소개된 인하대 조현정이가 좋겠다고 사회부 데스크에서 결정이 되었다고 한다. 취재에 따른 촌지가 없다.
보통 취재를 하면 기자에게 촌지를 주는 것이 예의 인줄 알고 있었는데, 이 날의 김기자는 나에게 언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했다. 안양의 갈비집에서 먹은 식사 값과 팝 레스토랑에서 마신 술값을 모두 김기자가 부담했다. 그리고 좋은 신문사는 취재비가 따로 있으니, 앞으로 그런 신문과 잡지에만 나가야 한다고 충고까지 했다. 이로 인하여 구독이나, 광고를 전제로 하는 매체에는 인터뷰를 철저히 거부했다. ‘조현정이를 취재하면 촌지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취재기자를 편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까운 기자들에게 들은 얘기로는 사람은 촌지를 잘 주는 사람에게는 두 번 이상 취재하러 가는 것은 기자의 양심상 어려우며, 소문이 난 사람에게는 오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큰 기자들이 찾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차라리 기자가 원하고 독자가 원하는 기사거리가 많은 것을 훨씬 좋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식사정도는 할 수 있다고 본다. - -조선일보 1985년 2월17일 일요일 신문기사 내용-
컴퓨터 예비 財閥 [대학생 社長]- 仁荷大 趙顯定군
소프트웨어 개발,작년 1억7천만원 벌어
주문쇄도 “올핸 16억 거뜬” - 2백여개를 헤아리는 국내의 군소 컴퓨터관련 업체 중 유수의 대기업계열회사들을 제외하고 올해의 [유망기업]으로 꼽히고 있는 한 업체의 사장이 젊은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놀라워 할 것이다. 인하대 전자공학과4년 趙顯定씨(28).
[비트컴퓨터]라는 간판을 걸고 첨단의 두뇌산업에 뛰어든 지 불과 수개월만인 작년 한 해 동안에만 1억7천만원을 벌었다. - 獨學연구 病院업무 電算化히트
의료보험환자의 수가계산, 진료카드, 수납업무 등 병원업무 전산화를 위한 소프트웨어를 개발, 서울과 각 지방의 50여개 종합병원에 기술을 제공했고, 지금도 5천만원의 계약으로 병상 3백50여개인 안양 중앙병원의 전산화작업을 해주고 있다. 금년의 매출목표액은 16억원. 오로지 퍼스널컴퓨터에 젊음을 거고 부침(浮沈)이 무상한 소프트웨어업계에서 소규모 업체이긴 하지만 탄탄한 기반을 쌓아가고 있는 야망의 대학생 사장이다. 15명의 직원 중 경리 ,보조사원을 제외한 7명의 기술멤버도 모두 대학생 컴퓨터광(狂)들이다. 趙씨가 [모험산업]이라고 불리는 소프트웨어분야에 뛰어든 것은 83년 8월, 인하대전자공학과3학년에 다니다 군복무를 마친 후였다. 보증금 2백50만원에 월세25만원으로 얻은 서울성북구 석관동의 25평짜리 허름한 사무실에 틀어 박혀 하루 15~17시간씩 퍼스널 컴퓨터와 씨름을 했다. 그가 처음 개발해 낸 것은 친구 이모부인 장안이비인후원장 金정권씨(64)가 맡긴 병원업무전산화용 소프트웨어였다. 자신을 가진 趙씨는 이어 2만여명의 고객을 가지 월부서적전문 출판사로부터 전 고객카드를 전산화해 일-월별 입금액을 계산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해달라는 주문을 얻어냈고, 3개월이 걸려 이 작업을 끝내면서 재능은 컴퓨터 업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의 사무실엔 석영전자라는 국내 퍼스널컴퓨터 판매업체를 통해 주문이 쇄도했다. 석관등의 초라한 월세사무실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집]이 됐다. 작년 초에 청량리 맘모스호텔 객실 하나를 빌려 옮긴 [회사]는 보증금 1천 2백만원, 월세 1백20만원으로 객실 2개로 확장되었으며, 그는 [컴퓨터에 미친 대학생]을 조건으로 사원들을 모집, 본격적인 소프트웨어 전문업체로 진출했다. 그 때부터 작년 말까지 주문을 받고 개발한 프로그램은 1백 40여 가지. 병원업무전산화외에도 1천 5백여 설문을 통해 짝을 찾는 컴퓨터 중매, 7천명의 종업원을 가진 중소기업의 입금관리 시스템, 사료성분배합 등 시장에 내놓기만 하면 돈이 굴러들어 오는 제품들이었다. 金덕성(24.명지대 전자과4년),金권철(24.인하대 전자공학과4),崔창수(24.인하대 기계과4), 동생 顯東씨(25.인하대 경영학과4)등이 그와 함께 이런 프로그램들을 개발해온 [대학생 사원]들이다.
趙씨의 손재주는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경남 김해가 고향인 그는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여 가정이 어려워지자 혼자 상경, 충무로에 있는 [삼성전기]라는 전파사에서 일자리를 얻어서 전자기술자로 성장하였다. 대학을 나온 전문적인 기술자가 되고 싶어 전파사를 그만두고 독학을 한 趙씨는 고입검정고시에 합격, 용문고를 졸업했고, 재학 중에도 중-고교교사들과 친척들의 TV를 수리해주고 받은 수고비로 학비를 댔다. 78년 인하대전자공학과에 들어간 후에는 고장 난 학교의 실험용방사능측정기와 1만분의 1초까지 측정가능한 시계오차량 측정기도 혼자 거뜬히 수리해 내는 등 [컴퓨터해결사]로 통했다. 오는 22일 인하대를 졸업하는 그의 올해 계획은 퍼스널컴퓨터끼리의 통신교환 소프트웨어와 최소가격으로 식품, 사료들을 생산할 수 있는 원료배합비율 및 성분량 산출 프로그램개발 등 수없이 많다. 회사도 확장, 직원 수도 곧 45명으로 늘릴 계획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金民培기자]
